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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사업 발전 위한 한·일 학술워크숍
문경시는 독립기념관에서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민족적 아나키스트였던 박열 의사를 선정했다. 이를 기념해 29일 한국자유공동체연구회와 일본 금자문자연구회(金子文子硏究會) 연구자들의 상호 교류 충전과 연대사업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학술워크숍을 개최한다.

이날 오전에는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 여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현재 건립 중인 박열 의사 기념관 관람, 박열의사기념사업회(회장 황병태) 관계자 면담을 가진 후 오후에는 약 3시간동안 문경새재박물관에서 '박열·가네코후미코, 동아시아 미래'라는 주제로 워크숍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 워크숍에는 한국 측에서 이문창·오장환·김창덕씨 등 한국자유공동체연구회 회원 10여 명이 참석하고, 일본측에서는 가메다 히로시·스즈키 유코·미즈키 아카라 등 금자문자연구회원 6명이 참석한다.

박열 의사는 1902년 3월 12일(음 2월 3일)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번지(샘골부락)에서 박지수씨와 정선동씨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유년 시절에는 혁식, 준식으로 불렸으나 이후 열로 개명했다.
18세가 되던 1919년 가을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과 메이지대학 교외생으로 신문배달, 제지공장직공, 조선통역원 등을 하며 고학 조선청년들과 함께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조선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을 펼쳤으며, 이 때 가네코후미코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

일왕과 황태자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대역죄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네 차례에 걸친 공판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됐다. 이 과정에서 박열 의사의 부인인 가네코후미코는 교살(자살이라고도 함)됐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남편의 고향인 문경(문경읍 팔리)에 안장됐다.

광복 후 23년간의 옥고를 마감하고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중 6·25전쟁 중 납북된 박열 의사는 1974년 74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89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가네코후미코와의 슬하에 아들 영일, 딸 경희씨를 뒀다.

가네코후미코 여사는 1923년 9월 박열 의사와 함께 일왕 암살 도모죄로 1926년 7월 23일 수감 중이던 도치키 형무소에서 의문의 횡사를 당해 1926년 11월 5일 박열 의사의 선영(先塋)인 문경읍 팔령리 산58-1번지에 묻혔다.

이후 문경시에서 지난 2000년 박열의사기념사업회를 발족해 전시관 건립, 생가복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면서, 팔령에 있던 가네코후미코 여사의 묘소를 2003년 11월 박열 의사의 생가 뒤편(마성면 오천리 샘골)에 이장했다.

<정왕식 기자>

정왕식  jws155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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