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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조형감각으로 빚어낸 기억[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㊻] 김유준 작가
나의하늘이야기20-2 130.3x162.2cm acrylic color & mixed media on canvas 2020
김유준 작가는 평면 작업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 자연에 대한 이해, 고향을 향한 마음 등을 표현하고 있다.

[환경일보] 시작도 끝도 없는 근원적인 이야기들의 순환을 생각하며 원을 떠올린다. 원은 점의 확대이고, 무한함의 상징이다. 원에 대한 의미 또한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경계의 안팎을 여유와 자유로움으로, 일상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껴 보려 한다.

나의 하늘이야기는 시간과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시간과 기억의 연속은 원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다. 시간과 기억으로부터 시작하는 나의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해주고, 지표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추억 예감 기억 기대와 같은 내면적 삶을 채워주는 중요한 것들이다.

모든 것이 혼돈과 함께하지만, 그것은 질서 없는 절대적 어둠의 공간도 밝음만의 공간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가능성과 새로움을 간직한 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여명의 공간과 색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있다’라는 천원지방의 기하학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못이 그러하다. 네모의 연못에 둥근 섬을 통하여 천원지방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곳 연못에 고여 있는 물은 하늘 땅 그리고 삼라만상을 투영하며, 우주의 공간임을 암시하여 주고 있지 않은가.

나의 그림 또한 그러하다. 안주하기 좋은 네모 캔버스의 평면과 명상하기 좋은 원으로 조형돼 있다. <작가노트 중에서>

나의하늘이야기20-14 72.7x60.6cm acrylic color & mixed media on canvas 2020

김유준의 회화는 미니멀리즘을 기반으로 물성을 강조한 바탕처리, 하단에 부분적으로 자리한 정치한 묘사(극사실에 가까운)의 형상, 문자와 숫자 등의 개입으로 이뤄졌다.

외형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다분히 복합적인 화면이자 다양한 방법론이 구사돼 있다는 인상이다. 70년대 단색주의와 평면에 입각한 화면이자 그림의 오브제, 물질성의 강조, 극사실주의 혹은 형상미술, 나아가 한국성과 민족문화, 전통에 대한 이해와 반영이란 측면 역시 몇 겹으로 얹혀있다.

이 종합적인 화면은 근작에 이를수록 더욱 유년의 기억, 고향과 연루된 정서적 잔상 아래 추려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고향, 기억, 자연주의 같은 항목이 뿌리 깊게 드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특징 중 하나가 어린 시절을 간직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유년의 기억이 없는 인간은 없다. 그리고 인간만이 그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김유준의 최근작은 무엇보다도 유년시절 겪은 자연에 대한 감각적 기억을 매개로 한다. 신체 안에 각인된 기억의 파편들을 별자리처럼 흩뿌려놓고, 잃어버린 추억의 흔적들을 주술처럼 불러들인다.

나의하늘이야기20-27 116.8x91.0cm acrylic color & mixed media on canvas 2020

흰색으로 점유된 바탕엔 검은 원형의 점들이 둥실 떠 있다. 단색으로 칠해진 바탕 면은 실은 미묘한 질감처리로 마무리됐다. 다분히 ‘미니멀’하고 평면적인 바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평면성을 약간씩 흔드는 질감을 부여하고자 융기한 부분을 슬쩍 만들어놓은 것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화면은 일정한 시간과 거리 속에서 다른 느낌과 맛을 자아낸다. 단색의 화면이지만, 실은 무한한 변화가 있다. 밋밋한 평면인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편차를 연출하고 있는 형국이다. 단순하고 밋밋할 수 있는 단색의 평면성을 흔들거나 회화성이 풍부한 질감, 화면을 연출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질감과 촉각을 동반한 화면 위로 새까만 원형(점)이 달처럼 자리하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이것은 별의 이미지다. 아득한 창공에서 빛나는 별은 너무 먼 자리에 있는, 여전히 신비스러운 자연의 메타포이다. 동시에 누군가의 얼굴이나 존재(마치 수화 김환기의 점묘화처럼)이자 추억의 사연들이기도 하다. 압도적인 까만 점들은 하얀 바탕에 적막하면서도 힘 있게 자리하고 있다.

아크릴로 칠해졌으나 먹색을 연상시키는 색조는 다분히 수묵화 느낌을 부여하기도 한다. 하단에 있는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진 형상도 마찬가지다. 김유준의 작업은 전체적으로 수묵으로 그려진 동양화의 정서를 진하게 풍긴다.

나의하늘이야기19-90 65.1x90.9cm acrylic color & mixed media on canvas 2019

또 다른 그림에는 하얀색의 별, 원형의 점이 화면 가득 중심부에 박혀있다. 커다란 알이다. 윤곽선은 연필로 그어졌는데, 슬쩍 뭉개져 흐릿하고 퍼져있다. 또는 질감을 자아내는 재료를 구사하는 대신 시트지 등을 원형으로 오려 부착하는 때도 있다. 이른바 오브제를 사용한 회화이다.

화면에 밀착된 얇은 물질은 피막을 형성하면서 하단에 그려진 자연·전통 이미지와 달리 인공·현대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이는 손으로 이뤄진 것과 다른 사물성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물감 대신 인공재료가 금빛,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이 원형의 물성은 강렬한 환영을 자아내면서 평면성을 벗어나 있다. 시트지의 주름과 그 표면이 끌어들이는 외부의 풍경은 화면에 또 다른 깊이를 설정하고 연출한다.

나의하늘이야기20-3 130.3x162.2cm acrylic color & mixed media on canvas 2020

하단에는 가늘고 여린 선으로 모종의 이미지가 슬쩍 그려져 있다. 마치 까만 점(별의 무게)을 의식하듯, 그 존재와 한 쌍을 이루면서 위치한다. 대부분 고전에서 빌린 이미지들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그려진 일부(소나무, 잣나무, 집),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일부(인왕산, 운주사의 석불, 석탑),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이 대표적이다.

김유준은 고전의 일부 혹은 그가 답사한 유적지의 어느 편린을 그대로 모사해서 그려 넣었다. 작고 깜찍하게 그려진 이미지가 감각적으로 빛난다. 그 사이로 다시 별자리가 매우 가는 선을 이루며 설핏 지나가고 빨강, 파랑의 작은 점이 찍혀 있다.

더불어 단기연호와 한자어로 ‘유준’이라 쓰인 작가의 이름과 그림의 제목인 ‘시간기억’이 날렵하고 가늘게 적혀있다. 작고 가는 붓으로 예리하게 기술된 그의 서체는 동양화 모필의 맛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이 문자들은 두툼하고 거친 질감과 대조적으로 화면 위에 감각적으로 부유한다. 전체적으로 그래픽하고 디자인적으로 만져진, 압축적이며 간결하게 조율된 화면이다.

나의하늘이야기20-13 72.7x60.6cm acrylic color & mixed media on canvas 2020

김유준의 근작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감수성의 근간을 겨냥하는 작업이다. 물론 이는 한국전통문화에 대한 경험적 이해와 고향에 대한 유년의 기억을 모종의 상실로 간직한 세대에게 가능한 일이다. 동시대 젊은 세대에게 그러한 추억은 거의 부재할 것이다.

김유준은 서양 현대미술을 습득·체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 안에 유년의 기억과 고향에 대한 정서적 체험을 비벼 넣고, 이를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종합적으로 형상화해냈다. 그의 작업에는 197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궤적이 고스란히 반영된 동시에, 그 세대가 겪어낸 삶의 감수성 역시 눈처럼 내려앉아 있다.

이채빈 기자  green900@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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