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특집 특별기획
존재와 가상을 넘나드는 ‘전지연의 추상화’[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㊸] 전지연 작가
Flowing-2001(1) 97x1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환경일보]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관계들은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퇴색과 소멸을 반복하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나의 작품은 단편적인 관계보다는 인생이라는 파노라마 안에서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관계란 ▷절대자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이 모든 관계는 결국 ‘화해와 사랑’으로 귀결돼야 한다.

내가 나를 용서하고 사랑할 때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랑은 절대자의 사랑에서 배우게 된다. 그뿐 아니라 피조물을 위해 창조된 아름다운 자연에서 진리를 배우기도 하고, 상호순화 과정 안에서 우리는 ‘위로’ 받거나 ‘치유’ 받게 된다.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자연은 아름다움, 사랑, 기다림, 인내, 순종, 신비로움 그리고 휴식의 공간까지 많은 부분을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와 공유하기를 원한다.

나라는 존재의 소중함과 타인에 대한 소중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의미하며, 이는 친밀한 소통의 역할을 한다. 세상의 이치는 사고파는 것이지만, 우리의 이상적 세계는 대가 없이 주고받는 것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얼개>는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며, 나아가 절대자를 향해 가는 ‘사랑의 시간’이기도 하다. 화면에서 얼개(조형물)는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의미한다. 본향을 향해 가는 형상적 구조물은 늘 방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희망과 자연의 흐름, 질서, 생명의 순환 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즉 자신의 의식세계 또는 마음을 투사시키는 얼개를 띄워 놓음으로써 절대자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까지 자유로운 희망의 항해를 꿈꾼다.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엔 소망의 씨앗으로 누군가에겐 서로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씨앗이 되어 흘러가기를 바란다.

모든 이들이 본향을 향해 가는 여정 중인 이 세상은 매우 아름답고,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 진리의 사랑을 알고 배울 수만 있다면···. <작가노트 중에서>

Flowing-2002(4) 112x1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전지연의 그림은 추상인가? 추상이란 외부세계를 연상시키는 구체적 이미지가 화면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추상화는 보아도 알 수 없는 것,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추상화 역시 우리 눈에 절대적으로 호소한다. 망막에 우선으로 의존하는 그림이다. 비가시적인 것의 시각화, 그것은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을 안긴다. 무명의 것, 아직 인간의 개념 체계 아래, 언어의 그물 안에 잡히지 않은 것들이다. 어쩌면 원초적인 회화적 행위나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 안에서 가능한 것의 모색이기도 하고 이미 존재하는 대상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하고 비대상적인 것을 통해 말을 건네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런 추상의 역사도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칸딘스키의 최초 추상을 기원으로 삼는다면 말이다. 모더니즘의 역사를 통해 회화는 평면으로서의 그림의 조건을 새삼 확인하고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물감, 붓질, 물성의 확인 그리고 대상에서 자유로운 그림의 길을 펼쳐냈다. 그림 자체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종국에는 화면 안에서 그림이 실종되거나 그림 자체가 소거되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는데 근자에 다시 그 추상의 여러 갈래가 다시 스멀거린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추상의 도래는 어떤 것일까? 사실 그림은 구상이면서도 추상이고 따라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나 차이라는 것도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회화 자체는 이미 물질이자 관념이고 구체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상의 것이다.

Flowing-2002(1) 72.7x72.7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전지연은 파스텔 색조의 부드럽고 화사한 색상을 선택했다. 그리고 납작하고 일정한 두께를 지니게 해서 칠했다. 단정하고 반듯하면서도 단호하고 매끈하다. 정확하게 일정한 면적을 메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분방한 붓질이나 제스처를 억압하고 물감을 성형해서 밀어 올렸다. 따라서 물감은 하나의 살, 육체가 되었다. 그것은 물감이면서 동시에 캔버스 표면을 물감으로 치환해 만든 또 다른 물질로 다가온다. 여기서 색은 작가 심성의 재현이자 그 자신이 선호하는 색채일 것이며 또한 전체적인 화면 구성의 차원에서 배려된 색채일 것이다. 다분히 자아나 주관성의 대리물로,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에서 고려된 색상일 것이다. 색은 이미 그것 자체로 충분히 그림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색과 색의 관계성으로 인해 고려된 회화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바둑판의 돌처럼 이루어진다. 하나의 돌이 놓이면 다른 돌이 그 돌로 인해 불가피하게 놓이듯이 하나의 색이 결정되고 칠해지면 이내 그 색 옆에 다른 색이 자연스레 파고들어 칠해진다. 하나의 색이 또 다른 색을 부른다. 그것은 작가의 호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면에 올려진 색 간의 호출에 의해서이다. 그러니 색은 결코 소리를 지르는 법 없이 여러 색을 연쇄적으로 부른다. 더불어 특정한 색의 호출뿐만 아니라 그 색의 크기 역시 결정된다. 그렇게 해서 색상들이 흘러 다니고 색면이 유동한다. 평면 안에서 색, 색면과 색면으로 만들어진 선들이 춤을 추듯 활력적으로 유동한다. 생명력이 넘치고 그만큼 활기찬 기운이 느껴지는 밝은 화면이다. 그만큼 장식성과 명랑함이 느껴진다. 모종의 감성적인 힘으로 충만한 화면이다.

Flowing-2004(5) 162.2x112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작가는 그 색면 덩어리를 단호하고 예민하게 절개한다. 화면은 그렇게 몇 가지 색상으로 분할된다. 어떤 형태가 화면을 점유하는 게 아니라 색이 우선 화면을 차지한다. 단색의 평면이 일정 부분을 마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따라서 그림은 커다란 색채 덩어리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색채 덩어리로 분산되고 흩어진다. 색채의 차이가 먼저 그림을 만들고 색과 색의 경계가 색을 발생시킨다. 더러 선은 평면에 약간의 높이를 만들며 융기한다. 또는 표면에 음각으로 파고든다. 선이 색을 구분 지으며 자연스레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선이 기하학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선의 자취를 몰고 가는 형국이다. 여기서 선은 색면의 차이와 각 면의 경계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겨난 상처이자 특정 색면을 윤곽 짓는 꼴이기도 하고 동시에 색면에 모종의 형태를 안겨주는 차원으로도 작동한다. 이 형태가 각 색채 조각을 다분히 상징적 존재로 부양시킨다. 그로 인해 추상화이면서도 어딘지 구상화의 흔적, 혹은 풍경의 분위기가 풍긴다. 물감의 발림 역시 다소의 두께, 질감을 동반하기에 화면은 평면적이면서도 촉각적인 편이다. 그것은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을 다분히 표현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Flowing-2004(1) 130x130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선의 대조와 충돌 등 여러 대비적 요소들은 예민하게 길항한다. 전지연의 그림은 색채, 물감, 붓질, 그리고 색면과 도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끼리의 관계 배열과 증식으로 채워져 있다. 외부세계를 연상시키거나 그 무엇을 지시하기보다는 그림을 이루는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들이 보여주는 상황성이 먼저 감지되는 편이다. 아울러 공간에서 진행되는 색채 간의 팽창과 수축, 확장과 집적, 색면과 구체적인 형상은 부재하지만, 잠재적인 형태소는 여전하다. 아몬드형의 꼴은 빈번하게 출현한다. 그것은 배, 방주, 요새, 성채, 혹은 집이나 마음의 결정체, 보석, 단단하고 안전한 방패 등을 연상시킨다. 막막한 화면에 그 형태가 반복해서 출몰한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에게 무척 위안이 되는 상징이거나 자신의 존재감을 표상하는 존재인 듯하다. 산뜻하고 선명한 색상, 다소 엄격한 색면을 바탕으로 그 위를 부유하는 이 자기 암호로서의 도상은 전지연만의 특별한 이미지이자 서사적인 추상, 상징적인 추상화를 만드는 결정적 존재다. 작가는 자신의 마음과 내밀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상징성을 지닌 이 형태를 동원해 서사적인 충동을 간직한 추상화를 내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Flowing-2002(5-1) 162.2x112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전지연의 그림은 간편하게 구상으로 귀환할 수 없고 그렇다고 형식적 추상의 굴레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회화(추상)를 존속시키려는 시도들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색채와 선만으로도 아름답고 매혹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그림에 대한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외형적으로는 색면 추상이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여러 차이를 만들어 내면서 상징적이고 풍경적인 추상, 언어적인 추상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몇 가지 상징적인 패턴을 반복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보인다. 여전히 추상회화의 틀 안에서 말이다.

화가 전지연은 생명력 넘치는 추상회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채빈 기자  green900@hkbs.co.kr

<저작권자 © 환경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채빈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포토뉴스
[포토] 대한건설보건학회 후기 학술대회
[포토] 한국물환경학회-대한상하수도학회 공동학술발표회 개최
[포토]최병암 산림청 차장, 생활밀착형 숲 조성사업 준공식 참석
[포토] ‘제22회 아름다운 화장실 대상’ 시상식 개최
수원에서 첫 얼음 관측
여백
여백
여백
오피니언&피플
제9대 임익상 국회예산정책처장 임명제9대 임익상 국회예산정책처장 임명
김만흠 국회입법조사처장 취임김만흠 국회입법조사처장 취임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