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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함께했던 황홀한 기억[김중식 작가가 만난 뻔FUN한 예술가 ④] 이존립 작가
정원-산책 50.0 140.0 Oil on canvas 2018 이존립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아름다운 색채와 서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서양화가 이존립

[환경일보]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넓은 들과 숲이 있는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크레파스를 주로 사용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빼곡히 칠해야 하는 과정을 싫어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수채 물감을 다루면서 미술에 흥미를 느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누나의 권유로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나의 미술 인생은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야상곡을 주제로 작업했다. 세상이 그렇기도 했고 나의 처지도 그러해서 야상곡을 통해 샐러리맨의 비애와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21세기의 화두가 자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란 단어를 정원으로 표현했고, 정원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은 2000년부터 시작됐다.

초록 향기 가득한 태초의 신비스러운 자연, 고향 마을에서 느꼈던 추억의 자연, 그리고 현재 내 삶의 터전인 여수에서 일상으로 접하는 자연 등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내 작업의 중요한 테마가 됐다.

자연은 결코 인간의 정복 대상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인간이 회귀해야 할 곳이다. 우리가 만든 문명에 지친 영혼들이 잠자고 놀고 쉴 수 있는 그곳이 진정 우리가 염원하는 파라다이스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에서 자아를 느끼며, 자아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庭園(정원) - 오랫동안 나 나름대로 추구해온 그림들의 명제로 그간의 삶과 기억을 뭉뚱그려 작업해왔다. 하루하루 체험으로 쌓이는 의식, 내면의 다양한 경험을 효과적으로 조율하려 했다. 내가 관찰한 대상들(주로 자연을 간결한 형태로 뽑아내거나 압축해 재현한 형태)로의 형상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채 자연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상징적인 추상성을 가미했다. 자연 풍경이 연상되기도 하고 사람과 새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색적인 색채와 기호적인 요소, 날카로운 선들의 조화로 충만하고도 서정적인 풍경의 범주에서 호흡하고자 한다.

Garden-Autumn 259.1 181.8 Oil on canvas 2017 이존립

나는 캔버스에 한 번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평 붓을 이용해 한국화적인 필력과 여백의 조형적 가능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를 갖게 됐다.

그간 수많은 작업 과정에서 경험한 실험적 모색들과 축적된 조형적 변주의 가능성이 급기야 나를 평면적 화면과 덧칠되는 새로운 가능성 앞으로 다시금 인도해 줬다. 여전히 나는 물성적인 측면에서의 새로운 형식과 회화적이며 한국화적인 새로운 모색과 실험을 집요하게 찾아가고자 한다. 모노톤(Monotone)으로 색감을 표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공간감을 느끼게 해야 하는 어려움, 화면상의 단순한 한계상황을 극복해 긴장감 있는 화면상의 변화와 대비, 그리고 무한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여백을 화면에서 자유롭게 표현하고 관람자들이 정원(庭園)의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여전히 물료의 새로운 제작을 위한 물성적 실험을 수반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이번 작품들은 멀리서 볼 때 단순한 면 처리로 보일 수 있으나 화면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여러 색의 중첩으로 나타나는 색층을 만날 수 있다.

정원-7칠월 259.1 181.8 Oil on canvas 2018 이존립

큰 화면 위에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 주는 희열감과 흥분이야말로 이번 작업을 통해 얻은 큰 성취감이고, 소재와 내용의 자연스러움은 한국적 미감에서 느껴지는 고결함과 숭고함이 아닌가 한다. 색과 형상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무한한 변화를 내재한 화면구성과 조형적 변화, 그로 인한 선과 여백의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은 앞으로 있을 나의 또 다른 회화적 관심거리가 됐다.

나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조화이다. 나무, 새, 꽃 그리고 사람들이 부유(浮遊, 공중이나 물 위에 떠다님)하다 가장 편안한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 본래의 모습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찾아내기 위해 동심의 눈으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거나, 추억 속에 침잠해 있는 내밀한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 심안(心眼, 마음속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힘)의 조리개를 밀었다가 당겨 보기도 한다. 흐리거나 선명한 기억을 채집해 그런 결과들을 미지의 캔버스에 색과 구도를 부여하고 나면 비로소 작품은 하나하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작품은 깨어나 나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나의 인생에 방향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얻어진 순수함과 깨끗함과 편안함이 나의 미학(美學)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정원이 지닌 자연의 생명력

정원-하 110.0 110.0 Oil on canvas 2019 이존립

이존립은 ‘정원’이란 테마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작가가 상상하는, 추억하는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작가의 추억과 꿈이 만든 유사 자연공간이다. 본디 정원이란 말은 ‘낙원’에서 나온 말이다. 불모의 땅에 싱그러운 천연의 자연 공간을 인위적으로 가설한 장소가 바로 정원이었다. 커다란 나뭇잎이 드리우는 그늘과 고갈되지 않는 샘,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새소리가 그치지 않는 공간에의 염원은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이다. 동양의 경우 자연은 인간 삶의 핵심적인 공간적 특성을 제공해줌과 동시에 모든 사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정원-기억 100.0 100.0 Oil on canvas 2018 이존립

이존립의 그림에는 인상주의와 자연주의, 그리고 향토주의 영향이 어른거리고 동시에 그 위로 동양화·산수화의 자연관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아울러 캔버스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색채로 환원되는 모더니즘 회화의 원리도 한 축으로 버티고 있다. 이는 한국 근현대미술이 서구미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 체질과 맞물려 살아남은 일련의 구상형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전통적인 한국 농촌문화의 한 흔적을 강렬한 추억으로 새겨둔 작가 자신의 유년기 추억과 그 안에서 자연과 함께했던 황홀한 기억들 아래로 적극적으로 수렴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바로 이 ‘정원’ 시리즈다.

이 그림은 구체적인 풍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색·물감만이 화면 가득 펴져 있다는 먼저 안겨준다. 다양한 색상의 조화로 채워진 그림이자 순도 높은 색채의 화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작업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일정한 면을 색채, 붓질로 채우고 있고 단속적인 붓질로 마감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문득 잎사귀와 꽃들을 지시한다.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나무와 인물, 강아지 등이 표현되고 있다. 개별 형상에 따른 구분이 일어나지만, 전체적으로는 색채 간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밀고 나간 흔적이 더 강하다.

정원-바람 72.7 50.0 Oil on canvas 2018 이존립

그림 속 대상은 자연과 공존하는 상황을 암시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한순간을 낭만적으로, 부드럽고 달콤하게 전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익숙하게 지닌 동화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그림이다. 남녀가 함께하기도 하지만 주로 젊은 여자·소녀가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여러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로써 그림을 보는 이들이 모종의 정서에 빠져들게 한다. 다분히 문학적인 성격이 짙은 그림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림, 유사하면서도 약간씩의 차이, 상황을 연출하면서 관자들이 그림 속 인물의 자리에 자신을 밀고 들어가고 싶다는 느낌을 자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관객들에게 그러한 자연이 제공해주는 그 원초적인 공간의 아름다움, 휴식과 치유 등을 선사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유년 추억이 깃든 자연 공간을 다른 이와 공유하고자 하는 한편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낭만을 다시 공고히 하려는 그런 의도다.

가을의 노래 72.7 50.0 Oil on canvas 2019 이존립

넓은 평 붓으로 시원하게 칠해나간 자취와 다채로운 색·면들로 직조된 화면은 캔버스의 평면성을 인식시킨다. ‘동양화에서 엿보는 일획으로 마감한 빠른 붓놀림’(작가노트)의 자취 또한 그 주변으로 흩어져 있다. 붓질의 흔적이 유난히 강하게 다가온다. 커다란 잎사귀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의 경우에는 납작하게 칠한 색·면을 중첩하면서 배경으로 점차 그 형태들이 사라지는 편이다. 붓질이 퍼져나가면서 공간 안으로 지워지는 형국이다. 그것이 원근을 대신하면서 평면 안에서 나름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동시에 단일한 색·면으로 마감된 배경 역시 평면성을 강조하면서도 무한한 공간감과 더불어 밝고 화사한 자연의 기운이 가득한 공간의 힘을 겨냥하고 있다. 한편 넓은 잎들 사이로는 원형과 별의 형상을 지닌 꽃들이 두툼하게 칠해진 물감의 물성과 예민하게, 촉각적인 붓질로 인해 생동감 있게 출몰한다.

근작에 와서 이러한 꽃의 묘사, 질감의 톤, 그리고 화려한 색채들의 상호구성과 일획의 맛을 주는 붓질이 상당히 완숙하게 처리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것 역시 자연이 지닌 생명력, 자연현상에 내재한 기운의 포착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 점은 그가 보여주는 익숙한 서사와 정서를 보완하는 상당히 중요한 그림의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표면에 사건을 발생시키는 회화에서는 그림이 그려지는 방식, 표현의 스타일, 화면의 감각적인 맛이 새삼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채빈 기자  green900@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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