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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 들려주는 노래 5]
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에 산다

[환경일보] 활짝 갠 하늘과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 봄의 초대는 참으로 화사하고 유혹적이다.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바깥에 나오니 콧노래마저 흘러나온다. 오늘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시작해 서대문 일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가려면 전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리면 된다. 5번 출구로 나가면 곧장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향하지만, 4번 출구로 나와 독립문을 보고 서대문 독립공원을 지나서 올라가는 것도 좋다. 공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야외학습을 나온 학생들이나 산책하러 나온 노부부, 이웃인지 친구인지 모를 사람들끼리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과도 쉽게 마주친다.

새 초록의 잔디와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다 앞을 보니 언덕 위로 붉은색 벽돌 건물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개소해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됐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수감됐다. 그리고 1998년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재탄생됐다.

매표 후 들어가면 3·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돼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동, 역사전시관 등 여러 건물이 있다. 건물 안에는 체험할 수 있는 벽관, 독방, 옥중 생활실 등이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돼 움츠러들었다.

수감자는 특등급이라 해도 400g, 최하일 경우 겨우 180g의 식사 배급을 받고서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일과표를 보니 절로 탄식이 나왔다. 어느 건물에서는 수년간 감옥 생활을 견딘 분의 증언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끔찍한 육체적 고통은 물론 인생까지 일그러졌지만, 독립운동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마음을 깊게 울렸다.

역사관에는 외국인도 많았다. 아마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찾아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생생히 보고자 한 그들의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았으리라.

건물 밖에는 관람객들이 쉴 수 있도록 잔디 위에 벤치들이 곳곳에 비치돼 있었다. 잘 정비된 환경이었지만 오히려 편하게 쉬는 것이 불편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란색이 붉은색 건물과 대조를 이루어 선명한 인상이 남았다.

명절 당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아침 9시30분부터 6시까지 성인은 3000원의 요금이 있으니 방문 시 참고하면 좋겠다.

◇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나와서 독립문역 사거리를 지나 교남동 주민센터 쪽으로 건넌다. 주민 센터를 오른쪽에 두고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사직터널이 보인다. 거기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권율 장군 집터와 딜큐샤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홍난파 가옥이다.

권율 장군 집터는 이미 알고 갔듯이 나무 아래 집터라는 표지석만 하나 남아 그곳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권율 장군의 집터임을 알려준다. 아울러 보통 그것을 보고나면 사람들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지상 2층 규모의 양옥인 딜큐샤로 향한다. 이 집의 주인은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와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이다. 하지만 작년 11월부터 보수 공사를 시작해 가옥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오른쪽으로 돌려 홍난파 가옥으로 향했다. 처음 집을 보는 순간 그가 외국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어 지었다는 이 집에서 작곡가 홍난파가 6년간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집 밖에는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어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기분도 즐겁게 했다. 그리고 집 안에 들어서면 귀에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와 다시 한 번 방문객을 정답게 맞아준다. 그때 들은 노래는 고향의 봄이었다.

집은 지하, 그리고 1층으로 지어졌는데 아기자기한 소품과 정갈하게 단장된 모습이었다. 또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사진이나 1층에 그랜드 피아노 외에도 지하에 손때 묻은 오르간 등이 있어 집안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딜쿠샤는 보지 못했지만 홍난파 가옥의 아름다움에 취해 집을 나설 때는 행복한 마음을 안고 나왔다.

◇ 월암근린공원

월암근린공원

홍난파 가옥에 도착하기 직전 빌라 사이에 오르막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다음 장소인 돈화문 박물관 마을을 향한다. 그러나 길은 단순히 지나치는 것으로 여길 게 아니다. 막바지 벚꽃이 바람에 흐드러지게 날리고 성곽길 위로 노오란 개나리가 피어 봄 동산을 방불케 했다. 이곳의 이름은 월암근린공원이다. 산책로와 서울 성곽길이 이어지는 작은 공원인데 공원 안에 서울 성곽길은 인왕산 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또 여기에는 1904년 조선으로 건너와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의 집터도 남아있다. 그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 돈의문 박물관 마을

돈의문 박물관 마을

월암근린공원에서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한옥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인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을 준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꾸며진 광장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끈다. 또 풍성한 무료 전시와 사진 찍기 좋은 소품들이 관람객의 즐거움을 자아낸다. 마을에는 극장을 비롯해 사진관, 이용원, 컴퓨터 게임장 등 지금은 자취가 사라진 추억의 장소가 옛 추억을 소환한다. 지금까지 걷느라 조금 피곤하다면 쉬어갈 만한 카페도 있다. 여러모로 들러볼 만한 마을이다.

◇ 경교장

경교장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서 나와 강북삼성병원으로 길을 건넌다. 병원을 향한다는 생각으로 건물 사이로 들어가면 경교장을 찾을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르고 경교장이 따로 분리된 건물이라 생각했다가 가까운 거리임에도 한참을 이리저리 헤매고 말았다.

경교장은 일제시대 친일파 최창학의 소유였으나,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의 거처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으로 사용됐다.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 뒤 강북삼성병원의 일부로 사용됐다가 2013년 경교장의 모습을 복원했다.

지하에는 전시실이, 1층에는 응접실과 귀빈 식당 등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김구 선생의 침소와 집무실 등이 있다. 특히 2층에는 1949년 6월26일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신 역사적 현장이 남아있다. 그곳에 해설사 한 분이 자리를 지키고 계셔서 김구 선생의 가족이나 서거 당시의 일에 대해 자세하고 정확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7대 독자인 선생은 부인과 다섯 자녀 중 네 자녀를 중국에서 폐결핵으로 잃고 막내아들만이 살아남았는데 지금은 그 자손들이 많이 번성했다고 하셨다.

총탄 자국이 난 유리나 지하 전시실에 있던 그의 데드 마스크(Dead mask), 피 묻은 옷 등을 보니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 안타까운 현장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들었다.

◇ 서대문 골목길을 나오며

서대문 골목길에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희생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 그들은 기념일이나 국경일에만 잠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가 없이 누리는 햇살 좋은 하루도 감사하고 이 땅에서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음에도 감사하며 골목길을 나왔다.

<글·사진=박정은 자유기고가>

이채빈 기자  green900@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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